이미지가 말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글 : 최랑식 (Photo Times Korea)
1. 서론: 구조 속에서 읽는 정주하의 사진
정주하는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중요한 흐름 속에 있는 작가다. 농촌 공동체의 소멸, 산업화가 남긴 지형, 원자력 발전소라는 국가 시스템의 문제를 그는 1990년대 초부터 오랜 시간 탐구해왔다.
그의 방식은 단일 이미지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한 장소를 수년에 걸쳐 반복적으로 방문하고, 이미지들을 연작의 형태로 배열한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개별 이미지보다 연작 전체의 구조 속에서 읽혀야 한다.
정주하의 사진 앞에 서면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인다. 파 줄기가 있고, 농부의 얼굴이 있다. 해수욕장이 있고, 피서객들이 있다. 낚시하는 사람이 있고, 비어 있는 거리가 있다. 흐린 낮이고 조용한 풍경이다. 그래서 관객은 잠시 시선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연작들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기존의 비평들은 정주하의 사진이 만들어내는 불안과 위화감의 정서를 정확하게 포착해왔다. ‘은폐된 불안’, ‘일상의 이면’, ‘보이지 않는 위험’ 같은 표현들은 작품이 남기는 감각을 잘 설명한다. 그러나 그 감각이 어떤 이미지 배열과 시선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논의되었다.
이 글은 바로 그 구조를 다시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땅의 소리」는 땅과 인간의 관계를 반복과 촉각적 이미지 속에서 축적시키며 작동한다. 반면 「불안, 불—안」은 위험이 어떻게 풍경 속에 자연화되는지를 보여준다. 두 연작이 공유하는 것은 하나다. 이미지는 직접 설명하지 않으며, 의미는 관객의 인식 안에서 뒤늦게 발생한다는 점이다.
2. 「땅의 소리」 — 눈이 아니라 몸으로 듣는다

「땅의 소리」(1996~1998) 사진집을 펼치면 일반적인 농촌 기록사진과는 다른 장면들이 이어진다. 파 줄기들이 검은 실루엣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화면은 식물의 줄기들로 가득 차고, 다음 장면에서는 흐릿한 농부의 얼굴이 등장한다. 연작은 식물과 인간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교차시킨다.
흑백의 선택은 단순한 미적 결정이 아니다. 이 연작에서 흑백은 특정한 시간성을 지운다. 계절도, 연도도, 사건의 전후도 흐려진다. 그 대신 화면은 강한 콘트라스트로 구성된다. 검게 눌린 전경과 희게 날아가는 하늘. 배경 정보는 거의 사라지고, 남는 것은 형태와 질감뿐이다.
카메라는 극도로 낮은 위치에서 식물들을 올려다본다. 인간의 눈높이라기보다, 거의 땅에 붙어 있는 시점에 가깝다. 정주하는 실제로 논과 밭 가까이에 몸을 낮춘 채 촬영했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낮아진 시점 속에서 파 줄기 하나는 거대한 존재처럼 보이고, 농부의 얼굴 또한 하늘을 향해 떠오르는 형상처럼 보인다. 몸을 낮춘다는 것은 단순한 구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대상 앞에서 인간 중심의 시선을 내려놓는 태도이며, 땅과 식물과 인간을 같은 높이에서 마주하려는 존재론적 선택이다.
중요한 것은 식물과 인간이 완전히 동일시된다는 점이 아니다. 오히려 이 연작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같은 땅의 리듬 속에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같은 하늘 배경, 같은 낮은 시점, 같은 흐림 효과가 반복되면서 인간의 얼굴은 식물처럼 보이고, 식물의 줄기는 인간의 신체처럼 느껴진다.

흐림(blur)의 미학
흐림(blur)은 단순한 기술적 실수가 아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초점을 흐리게 한다. 사진집의 작가 노트에서 정주하는 이 사진들이 단순한 정보로 읽히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초점이 흐려질수록 개인적 정보는 약해지고, 대신 존재의 감각이 전면으로 떠오른다.
이 연작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 이미지의 의미보다, 반복되는 이미지들이 관객의 몸 안에 축적되는 방식이다. 땅의 거칠음, 베어진 밑둥의 뻣뻣함, 비워진 밭의 서늘함 같은 감각들이 시각적 정보가 아니라 촉각적 경험처럼 다가온다. ‘땅의 소리’라는 제목은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킨다. 여기서 땅을 인식하는 기관은 눈만이 아니라 몸 전체다.
서사학자 모니카 플루더닉은 이야기가 단순한 사건의 연쇄가 아니라 관객의 체험을 통해서도 형성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녀가 말하는 ‘경험성(experientiality)’ 개념은 「땅의 소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연작에는 명확한 사건도, 드라마틱한 갈등도 없다. 그러나 이미지의 반복과 리듬 속에서 관객의 몸은 먼저 반응하기 시작한다. 이야기란 사건이 아니라 체험의 축적 속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작의 후반부에 이르면 수확 이후의 밭이 등장한다. 잘려 나간 작물의 흔적, 거둬들인 자리에 남겨진 것들, 듬성듬성 드러난 땅. 연작은 성장의 풍경으로 끝나지 않는다. 무언가가 있었다는 흔적 위에서 멈춘다. 정주하는 이 작업의 출발점에 대해, 논둑 위 목 베인 벼를 보며 “먼 역사의 조상으로부터 지금의 내게 이르는 따뜻한 포옹” 같은 감각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그 감각은 하나의 이미지 속이 아니라 반복되는 연작의 구조 안에서 서서히 발생한다.
3. 「불안, 불—안」 — 위험이 풍경이 될 때
「불안, 불—안」(2003~2007)은 재난의 순간을 기록한 사진이 아니다. 폭발도 없고 공포 장면도 없다. 극적인 대비 역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
사진집에는 흐린 여름 바다, 피서객들, 낚시하는 사람들, 텐트 앞의 아이들, 운동시설에서 쉬는 주민들이 등장한다. 모두 평온하다. 그리고 그 풍경의 어딘가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 연작의 컬러는 의외로 평범하다. 맑고 선명한 여름빛이 아니라, 흐린 날의 납빛 하늘과 탁한 바다색이다. 그림자가 깊지 않다. 화면 전체가 균일하게 밝고, 공간은 납작하게 느껴진다. 원전 역시 프레임 중심에 놓이지 않는다. 인물과 시설 사이의 간격은 미묘하게 유지되며, 정주하의 카메라는 마치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거리를 둔다. 관광지에서 찍은 스냅사진 같은 이 거리감이 오히려 핵심이다. 극적으로 구성된 장면이었다면 관객은 즉시 그 의도를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들은 너무 평범해서, 처음엔 그냥 지나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원전 자체보다, 그것이 어떻게 더 이상 특별한 대상으로 지각되지 않는가이다. 원전은 사건이 아니라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다. 산처럼, 바다처럼, 이미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존재한다. 바로 그 순간 위험은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 위험사회의 특징을 ‘보이지 않는 위험’이라고 설명한다. 방사능 같은 현대의 위험은 감각적으로 즉각 인식되지 않는다. 냄새도 없고 형태도 없으며, 오히려 일상 속에 스며든 채 존재한다. 정주하의 사진은 바로 이 구조를 포착한다. 여기서 불안은 단순한 개인 심리가 아니라, 위험이 이미 일상이 된 사회 구조 안에서 형성되는 감각이다.
사진집 표지의 가마미해수욕장을 보자. 물놀이하는 피서객들 뒤로 원전의 돔 구조물이 보인다. 그러나 관객의 시선은 종종 먼저 사람들에게 머문다. 원전은 전경으로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풍경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부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원전이 들어선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지역 주민들과 방문객들은 그 시설과 함께 살아왔다. 반복된 공존은 원전을 일상의 배경으로 자연화시킨다. 정주하의 카메라는 바로 그 자연화의 결과를 보여준다.
그물을 던지는 어부 너머로 원전이 보이고, 텐트 앞 아이들 뒤로 냉각탑이 등장한다. 아버지가 아이를 안고 서 있는 해변의 뒤편에도 원전이 자리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평온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평온함 자체가 위험이 이미 정상화되었다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사진비평가 이선애는 이를 두고 *“즐거운 여가를 보낸 한때의 가족사진은 체계의 알리바이”*(이선애, 사진집 『불안, 불—안』 수록 비평)라고 썼다. 이 문장은 연작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는다. 행복한 일상의 이미지는 동시에 위험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기능을 수행한다.
관객은 이미지를 반복해서 보다 보면 뒤늦게 이상한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왜 모든 풍경 속에 저 구조물이 존재하는가. 왜 그것은 더 이상 특별한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는가. 질문은 즉각적으로 오지 않는다. 반복 속에서 천천히 발생한다. 정주하의 연작은 바로 이 지연된 인식의 과정을 통해 작동한다.
4. 「불안, 불—안」의 두 번째 얼굴

연작의 후반부로 갈수록 분위기는 달라진다. 여름 피서지의 활기 대신 마을 안쪽의 일상이 등장한다. 문 닫힌 상가, 텅 빈 카페, 접힌 파라솔, 빈 쇼케이스 옆에 서 있는 노인,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골목길.
어떤 사진에서는 원전이 거의 보이지 않거나 멀리 존재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 점 때문에 풍경은 더 무겁게 느껴진다. 연작의 앞부분이 원전 앞의 평온한 여가를 보여주었다면, 후반부는 원전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지된 시간을 보여준다. 성수기가 끝난 마을, 손님이 떠난 자리, 멈춰 있는 시간의 감각이 사진 안에 남는다.
이선애가 말한 *“과거는 떨어져 나갔고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이선애, 사진집 수록 비평)는 문장은 여기서 다시 떠오른다. 원전은 미래 산업의 상징처럼 존재하지만, 마을의 시간은 오히려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선애의 진단이 정서적 층위에서 작동한다면, 정주하의 카메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여름철의 풍경이 위험의 정상화를 보여준다면, 비수기의 풍경은 그 정상화가 지역의 시간 자체를 어떻게 멈추어 놓았는지를 드러낸다. 풍경 안에서 위험은 이미 ‘풍경’이 되었고, 그 사실 자체가 또 다른 위험이다.
5. 비교 분석: 같은 작가, 다른 서사의 방식
두 연작을 나란히 놓으면 정주하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사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 구분 | 「땅의 소리」 | 「불안, 불—안」 |
| 색채 | 흑백 사진 (특정한 시간성 약화, 오래된 기억의 층위 표현) |
컬러 사진 (여름 바다의 색채, 현실성과 현재의 시간 강조) |
| 시점 | 낮은 시점과 클로즈업 | 넓은 시야 (전경과 배경의 관계 강조) |
| 효과 | 촉각적 경험, 몸의 감각으로 축적됨 | 인식의 균열, 지연된 인식의 과정 |
| 공통점 | 직접 설명하지 않으며, 의미는 이미지 하나 안에서 즉각 완성되지 않고 반복되는 배열 속에서 천천히 발생함 | |
두 연작의 차이는 단순히 흑백과 컬러, 혹은 클로즈업과 원경의 문제가 아니다. 「땅의 소리」는 몸을 낮춰 땅에 밀착한 시점으로 식물과 인간을 같은 호흡 속에 포착하며, 관객의 신체 안에 감각을 층층이 쌓아간다. 반면 「불안, 불—안」은 일상적인 거리감을 유지한 채 원전을 풍경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 넣음으로써, 관객이 뒤늦게야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깨닫도록 이끈다. 하나는 몸으로 축적되는 서사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이 균열하는 순간을 통해 발생하는 서사다. 그러나 두 연작 모두 이미지가 의미를 직접 건네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하나다. 정주하의 사진에서 이야기는 항상 관객의 시간 안에서, 뒤늦게 완성된다.
6. 결론: 사진이 이야기가 되는 방식
정주하는 위험을 극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위험이 이미 일상의 구조 속에 스며든 상태를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진은 사건보다 지속 상태에 가깝고, 개별 장면보다 반복되는 풍경의 구조 안에서 읽혀야 한다.
-
- 「땅의 소리」는 묻는다. 우리는 언제부터 땅을 발아래 두고 보기 시작했는가. 몸을 낮추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
- 「불안, 불—안」은 묻는다. 그 평온함은 이상할 정도로 오래 지속된다. 우리는 왜 저 구조물을 더 이상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가.
두 연작 모두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기보다, 관객이 이미지 안에 오래 머무르는 동안 서서히 작동한다. 정주하의 사진은 설명을 완전히 닫아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지 사이에 설명되지 않는 잔여를 남겨둔다. 관객은 반복되는 풍경 속에서 조금씩 불편해지고, 뒤늦게 무엇인가를 인식하게 된다. 이야기는 사진이 직접 말해서가 아니라, 이미지 앞에 오래 머무르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발생하는 순간, 관객은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단지 과거의 풍경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의 구조라는 것을.
* 본 비평문은 정주하의 사진집 『땅의 소리』(눈빛,1999)와 『불안, 불—안』(눈빛출판사,2008), 그리고 이선애·김영민의 동시대 비평을 참고해 작성되었습니다